top of page

* 고등학교 배경(?)의 루프물. 상당한 선동과 날조 주의. 중혁독자입니다.
* 보고 싶은 부분 위주로 쓰다보니 글이 두서가 없네요.

  

 

 


 유난히 날이 푸르렀다.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일주일 앞두었거나 말거나 시끄럽게 떠드는 것만이 저들의 사명이라는 양 삼삼오오 무리 지어 소란 자아내는 동급생들. 드르륵, 하고 문 열리는 소리. 나직한 한숨 끝 조용히 하라고 외치는 선생의 목소리. 다시 반복될 장면이 지겨워 중혁이 눈을 감으려던 찰나, 답지 않게 이어진 침묵.

 

어수선하게 떠들던 이목이 한곳에 집중되었고, 중혁은 반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새하얗게 부서질 것 같은 소년. 대체 어느 미친놈이 지금 전학을 와? 목소리 감출 생각도 않고 술렁이는 교실. 중혁은 소년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씹어 삼키기라도 하려는 듯 형형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초면에 그렇게 굴면 무례해 보인다는 걸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 건지. 역시 우리 중혁이는 귀엽다니까. 소년은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쓸데없는 단상과 함께 목 뒤로 넘겨버리고는 나긋하게 말문을 열었다.

 김독자야. 잘 부탁해.

* * *

 김독자의 전학도 중혁에게는 몹시나 충격적인 사건이었건마는, 그보다도 더 그를 당혹스럽게 하는 건 김독자의 언동 자체였다. 그날도 교탁 앞에서 자기소개를 마치자마자 대뜸 자기 옆자리로 와 앉더니 중혁아. 안녕? 하고는 말을 걸고, 그 뒤로도 곧잘 자기를 따라다니며 친근하게 말을 건네지 않았던가.

 

귀찮기는 해도 기분 나쁘다 생각은 들지 않아 내버려 두기는 했지만, 중혁은 기어코 김독자의 정체를 알아내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몇 날 며칠 첫 번째와 두 번째 여름을 곱씹어 보아도 김독자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재차 확인해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김독자에게 대뜸 너는 누구인가, 하고 물어봤자 독자는 그 특유의 말간 미소와 함께 그게 무슨 소리야 중혁아, 하고 살갑게 넘겨버리고 말 것이 틀림없을 터였다. 

***

 김독자 걔 게이 아니냐. 동급생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독자는 중혁을 한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건 중혁조차도 방해할 수 없는 독자의 일과였다.

 

우리 중혁이는 어떻게 한숨 쉬는 것까지 잘생겼지?

 

중혁아. 숨 닿을 만치 가까운 거리에서 독자는 중혁의 호흡까지 새기려는 것마냥 시야 가득 중혁을 담아냈다. 바라보는 걸로 부족했는지 조심스레 뻗어진 손. 닿기 직전의 허공에서 맴돌다 이내 거두어졌다. 중혁에게 어디까지 간섭해도 좋을지 시험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중혁아.

너는 모르겠지.

영영 모를 거야.

너의 첫 번째 여름도, 두 번째 여름도,

그리고 지금부터 이어질 무수히 많은 여름도, 전부 다 내가 수없이 읽었다는걸.

너는 나의 구원이지만 그것 또한 모르겠지. 중혁아. 나는 분명 너보다도 너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야. 자부할 수 있어. 독자는 미처 언어가 되지 못한 말을 가만 삼켜내며 웃었다. 이 순간에도 중혁에게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그 알량한 생각 하나가, 참 기뻤다. 자신이라는 변수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대는 모습이 그저 가여우면서 어여뻤다. 끝없이 반복되는 여름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너의 숨결 하나마저도 이 여름을 위한 안배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종내에 깨닫고 말 테지만 그 끝을 향해 내달리는 모습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류의 것이었다.

 

이것을 감히 사랑이라 불러도 될까 싶지만, 독자는 중혁을 향한 오롯한 갈망 하나만으로 이 여름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왔다. 활자가 빗발쳤고 억지로 그러쥔 구절 끝에 네가 있었다. 중혁아. 나 말고 또 누가 너를 위해 전부를 내던질 수 있을까. 질척한 기벽이 고개를 쳐들었다. 중혁은 분명 그의 영역에 타인 들일 생각 추호도 없을 테지만, 독자는 그 유일한 자격 얻은 이가 바로 자신이라 믿었고, 그 믿음에 자연히 웃음이 났다. 한 존재를 오롯이 소유하는 감각, 도취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쳐흐를 정도였다.

 중혁아. 나는, 너의 세 번째 여름의, 유일함이 될 거야.

* * *

 잠, 시만. 중혁아.

 

노을이 어그러졌다. 중혁의 손에 들려있는 책은 분명 이곳에 존재하지 않아 마땅할 물건이었다. 대체, 네가, 그걸 어떻게. 산란하는 어절. 김독자. 귓가에 울리는 음성이 아렸다. 억지로 떨쳐내려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하순 잘근 짓씹다가 중혁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멍청한 선택이라는 건 알았지만 배신감으로 얼룩진 눈빛을 견디기에는 독자가 중혁에게 너무도 유약했던 탓이었다.

 

그동안 즐거웠나. 중혁의 우악스러운 손짓에 파스스 튿어지는 낱장. 중혁을 저지하려던 몸짓은 하등 부질없는 것으로 전락했다. 쿠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독자의 몸이 사물함 벽을 타고 무너졌다. 열려있는 창문 틈으로 흩날려 사라지는 활자 더미들. 다 읽었다면 알고 있겠지. 김독자. 덤덤하게 이어지는 목소리. 네놈은 원래 이곳에 존재할 수 없다. 여상스러운 속도로 멀어지는 발걸음. 그토록 끝이 보고 싶었다면, 보여주겠다.  

     

 너의 세 번째 여름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KakaoTalk_20190331_171458124_편집본.png

[성좌,

'초록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번째 여름 

 

중혁독자 / 7대 죄악, 교만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