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無制
:절제하지 못 하다.
'제4의 벽'은 인내했다. 김독자가 말 못 하는 도깨비를 더 좋아할 때도, 자신을 끄겠다고 협박할 때도, 끊임없이 인내했다. 화나고 서운했지만 적어도 자신이 택한 사람이기에 조용히 삭혔다. 하지만, '제4의 벽'은 김독자가 저와 한 약속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서운함과 허무함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한 번 더, 김독자에게 자신은 그저 쓸모있는 스킬이며, 시끄럽고 귀찮게 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제4의 벽'은 제 벽에 어지럽게 써 내려가던 것을 멈췄다. 흔들리는 자신을 진정시킬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흔들리는 채로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벽 너머에서 무슨 일이냐는 김독자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아 무것 도.] 삐뚤삐뚤한 글씨로 답한 ‘제4의 벽’은 다시금 우울해졌다. 그러다 문득, 벽 한쪽 구석에서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는 문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김 독자가 부 족 해.' 그제서야 '제4의 벽'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김독자를 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벽이 처음으로 절망을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제4의 벽'은 늘 허기를 느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자신이나 김독자나 남의 이야기로 살아가기 때문에 늘 이야기를 갈구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단어로 조각내어 삼키는 것은 당연했다. '제4의 벽'은 언제나 그랬듯, 다른 존재의 이야기를 먹기 위해 이빨을 드러냈다. 맛있어 보이는 그것을 단숨에 삼키기 위해 벽은 입을 벌렸다. 그러나 조그마한 머리통을 삼키려 할 때, '제4의 벽'은 화들짝 놀라 이빨을 숨겼다. 벽은 처음으로 삼키려는 본능을 억제했다. 낯선 존재를 삼키려는 순간 자신이 아무거나 삼키는 것을 김독자가 싫어한다는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벽은 또 한 번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미 제 행동 하나하나에 김독자가 존재하고, 제 몸 구석구석에도 김독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제4의 벽'은 자신의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휘둘 리 면안 돼.' 자신은 김독자를 그 누구에게도 지킬 수 있는 대단한 존재이자, 자신이 없으면 김독자는 죽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존재. 그런 존재이기에 그저 화신에 불과한 김독자에게 휘둘리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제4의 벽'은 이름 모를 존재를 '김독자의 허락 없이' 씹어 삼켰다. 존재를 구성하던 설화를 뜯고, 조각낸 다음, 삼켰다. 하지만 그 허기는 가시지 않았다.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언제나 이야기를, 새롭고 완성도 높은, 신선한 이야기를 갈구하기 때문이겠지. '제4의 벽'은 이 허기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이고, 자신이 늘 갈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날, '제4의 벽' 앞에 '이 허기가 저 존재들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면?'이라는 문장이 들이닥쳤다. 커다란 글자가 갑작스럽게 제 앞에 나타나자 '제4의 벽'은 처음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저 존재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면? 저들의 이야기를 향한 것이 아니라면? '제4의 벽'은 고개를 저으려는 듯 몸을 떨었다. 그러다 불현듯, 아직도 영역을 넓혀가는 문장이 떠올랐다. 벽의 한쪽 구석에서 시작한 문장들. 그 문장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김독자의 손바닥 두 개 정도는 거뜬히 들어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4의 벽'은 자신이 이때까지 진실을 외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처음부터 이 허기는 김독자를 향한 거였다. 그 후로, '제4의 벽'은 '허기진다.'가 아닌 '김독자가 부족해.'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김독자가 부족해.' '김독자가 부족해.' '김독자가 부족해.'…. '제4의 벽'은 끝없이 중얼거렸다. 구석에서 천천히 크기를 키워나가던 문장들은 그 존재를 순순히 받아들이자 금세 벽의 반이나 차지하게 되었다. 억눌려있던 것이 터지며 원래의 크기를 드러낸 것이었다. '제4의 벽'은 어지럽게 공간을 차지한 문장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제4의 벽'은 김독자가, 부족했다.
누군가가 그랬다. 어느 문장은, 내뱉고 나면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고. 예를 들어, '사랑해.' 같은 문장. '제4의 벽'은 무감정하게 써 내려가던 서술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이 허기가, 김독자가 부족한 이 느낌이 그랬다.
-조금 더 김독자가 자신을 챙겨주고 나랑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친해지길? '제4의 벽'은 그 문장에 의문을 품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친해지는 것, 좋다.
-그리고 나를 봐주면 좋겠어.
'제4의 벽'은 그 문장에도 아주 잠시 의문을 품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김독자가 자신을 바라봐주면 좋을 것 같았다. 조금 더 자신을 아끼고, 말을 걸어주고, 자신만을 봐주고, 자신을…. '제4의 벽'은 이어지는 서술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서술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제4의 벽’은 몸을 떨었다. 아, 모르던 때가 나았을까. 벽은 슬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더는 참을 수 없이 김독자가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깊은 곳에서 자신을 죄어 오는 갈증, 허기, 공허함. 이것들을 오직 김독자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짙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말했듯, 어느 문장은 내뱉고 나면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제4의 벽'은 쉬지 않고 '김독자가 부족해.'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해결 방법을 생각했다. 김독자와 대화할까? 아냐, 약속도 기억하지 못하는걸. 그렇다면 어떡하지? '제4의 벽'은 사서들을 쳐다봤다. 사서들은 그들의 보스가 '그때'부터 심기가 불편함을 눈치챘다. '그때'. 김독자가 아닌 보스 때문에 도서관이 흔들렸던 날이었다. 보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혼자서 중얼거리다 불안하게 흔들린….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에 사서들은 책장을 붙잡고 흔들림이 잦아지길 기도했다. 이번에도 사서들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조용히 벽의 시선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다행히 그 간절함이 통하기라도 한 듯 '제4의 벽'은 금방 그 녀석들의 너머에 있는 한 책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도서관의 가장 구석에 있으며 멸살법이 아닌 도서가, 그러니까 김독자의 기억이 기록된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이었다. '제4의 벽'은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 어지럽게 쓰여있던 벽의 모든 문장이 지워지고, '먹고 싶다.'라는 문장만 끊임없이 쓰이고 있었다.
김독자는 어느 날부터 제 기억력이 점점 안 좋아진다는 것을 느꼈다. 소소하게 아이들과 한 약속들부터 시나리오에 대해 진지하게 나눈 이야기들까지. 중요도에 상관없이 잊기 시작했다. 아, 그렇다고 아이들과 한 약속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김독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내뱉는, 무거운 한숨이었다.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은 정확히 3일 전, 정희원이 '독자씨, 저번에 말한 그 계획 말인데요.' 하고 말을 걸어온 일 덕분이었다. 먼저, 김독자는 정희원이 말한 '그 계획'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말로는 '또' 까먹었다고 했지만, 김독자는 그 시나리오에 관해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눈 기억 자체가 없었다. 양쪽 모두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두 번째는 '또'가 붙은 만큼, 까먹은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번으로 네 번째라고 했던 가…. 정희원은 김독자의 네 번째 어색한 미소를 보며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김독자는 아직도 정희원의 그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독자씨, 이거 치매 아니에요?'
김독자는 그 전과 전혀 다른 의미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정희원을 바라봤다. 김독자가 다급하게 그건 아니라며 부정했으나, 정희원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김독자를 끌고 이설화를 찾아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치매는 아니었지만, 정확한 병명을 알아낼 수 없었다. 단지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그런 것 같으니 푹 쉬라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정희원은 그럴 리 없다고 이설화에게 다시 진찰해달라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몇 번을 해도 결과는 같았다.
그리고 3일이 지난 지금, 김독자 컴퍼니 사이에서는 '김독자가 치매에 걸릴지도 모른다, 스트레스를 지나치게 받고 있으니 쉬게 해야 한다.'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김독자는 또다시 한숨을 뱉었다. 치매가 아닌 것은 다행이었지만 여러모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정말 스트레스 때문일까…. 김독자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렸다. 물론 자신이 치매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말하는 '까먹었다.', '자주 잊는다.'는 것과 자신이 겪는 이 경험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까먹는다, 자주 잊는다는 것은 상황은 기억하나 그때 했던 말이나 행동을 잊는 것이라면, 자신은 그것을 한 상황까지 고스란히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필름의 중간이 뜯겨 나간 것처럼. 그래, 필름이 뜯긴 것처럼... 누군지 모를 도둑에 의해, 현재 자신의 기억에는 중간중간 이질적인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김독자는 그 감각이 굉장히 불쾌했다.
김독자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걱정을 한가득 담은 동료와 아이들의 표정이 지나가고,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이냐며 으르렁거리던 유중혁의 목소리가 지나갔다. 그리고, 아프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던 우리엘과 예상외로 머리를 뜯으며 아프지 말라고 후원을 보내던 제천대성이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제천대성의 후원에 놀라 지금 걱정해주는 거냐고 했더니 영문 모를 숫자가 가득한 메시지만 받았었지. 0487561, 08574, 53719, 1314* 이었던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해독할 수 없었다. 스쳐 가는 기억들에 픽, 바람 빠지듯 웃은 김독자는 문득 찝찝함을 느꼈다. 늘 자신에게 이상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반응하던 존재가 유독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제4의 벽'은 일주일 전 즈음부터 조용해졌다. 일주일 전엔 분명 제 혼자 부서질 듯 흔들려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고,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웃더니 지금은 또 쥐죽은 듯 잠잠한 것이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깨어있긴 한 건가…. 김독자는 혀를 차고는 중얼거렸다. 그러자, 기이한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사각 사각 사각….
-까드득까드득….
김독자는 깜짝 놀라 담벼락에 기대고 있던 몸을 고쳐 새웠다. 벌레가 무언가를 갉아먹는 소리 같기도 하고, 누군가가 딱딱한 것을 씹는 소리 같기도 한 것이 귓가를 맴돌았다. 사방이 고요한 곳에서 갑자기 들려온 기이한 소리는, 이내 이명이었다는 듯 서서히 사라졌다. 반사적으로 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은 불청객의 목을 당장이라도 베어주겠다는 듯 눈 부신 빛을 내뿜었다. 하지만 그 신념과 다르게 아무리 주위를 살펴도 벌레나 괴수는 볼 수 없었다. 가까이에서 들렸는데, 담장인가? 김독자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휙, 뒤돌아 담장을 살폈다. 허나 담장도 김독자가 기대어 서 있던 흔적만 있을 뿐, 소리의 근원이라 할만한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김독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감았다.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고개를 젖혔다. 진짜 스트레스 때문인가…. 김독자는 곤란한 듯 관자놀이를 누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밖에 있다면 또다시 감금을 당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의 가장 어두운 곳은 종이가 난잡하게 찢겨나간 책들과 부서진 책장으로 어지러웠다. '제4의 벽'은 그 가운데서 희열이라도 느끼는 듯 잘게 떨렸다. 일전에 '먹고 싶다.'로 가득했던 벽은, 이제 김독자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휘갈긴 듯 날카로운 필체로 쓰인 김독자의 문장에 '제4의 벽'은 만족한 듯 쓸어내렸다. 결국 지워지지 않는 허기를 김독자의 기억으로 채워갔다. 당장 김독자를 가질 수 없으니 과거의 김독자를 마주하므로 채워가는 것이었다. '제4의 벽'은 눈에 보이는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무 페이지를 펼친 다음 망설임 없이 찢어내었다. 거대한 이야기를 벗어나 너덜너덜해진 페이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틈으로 삼켜져, 그곳에서 단어로 조각나 사라졌다. '제4의 벽'은 천천히 김독자를 음미하며 삼켜갔다.
한 번 그 일에 손을 댄 '제4의 벽'은, 그 뒤로 아귀( 餓鬼 )라도 된 듯 아무 책이나 집어 들어 찢고 삼키는 것을 반복했다. 이젠 그것을 잠시라도 쉬면 다시 슬금슬금 고개를 드는 허기와 갈증을 견딜 수 없었다. 이미 '제4의 벽'은 눈앞에 있는 책을 삼키면 그것들에게서 간단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4의 벽'은 제게 들려있는 너덜너덜한 파편을 내려다봤다. [오늘은 일진이 나빴다. 그놈들에게 아침부터 끌려가….] '제4의 벽'은 입을 벌려 그 파편을 삼켰다. 문득, 벽은 어쩌면 자신이 김독자에게 중독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먹으면 먹을수록 기억이 아닌 실제를 갈구하고, 이제는 먹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것이 꼭 더 큰 쾌락을 갈구하고 금단증상을 앓는 중독자 같았다. 이번에도 '제4의 벽'은 자신에게 스며드는 김독자를 느끼며 연신 '조금 더, 조금 더.'를 중얼거렸다.
또다시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사각…. 까드득까드득…. 그때와 똑같은 소리였다. 벌레가 갉아먹는 소리 같기도 하고 누군가가 딱딱한 것을 씹는 소리 같기도 한 것. 김독자는 귓가를 맴도는 소리를 따라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차가워지며 굳어버린 고개를 억지로 움직여 뒤돌았다. 하지만 그때와 똑같이,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가슴 한편에서 스멀스멀 불안감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적어도 유중혁이나 한수영이라도 데려올껄.' 하고 뒤늦게 후회해보았지만 이미 히든피스를 빠르게 얻기 위해 각자 움직이기로 했고, 그 결정도 자신이 내린 것이었기에 이제 와서 무섭다고 같이 가 달라 부탁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 안 해…."
그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분명 같이 다녀달라고 부탁했다가는 두고두고 몇 년 치 놀림감이 될 것이 분명했다. 김독자는 서서히 작아지는 이명에 눈가를 쓸어내렸다. 안 그래도 요즘 건망증 비슷한 것이 심해졌는데, 이제는 안 들리겠지 하고 생각한 이명까지 다시 들리기 시작하니 환장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이명이 처음 들렸던 그 날부터 건망증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하긴, 그 날 피로가 최고를 찍었으니 이설화씨 말대로…. 잠깐, 더 심해져? 김독자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이 소리가 밖에서 들리는 게 아니라 안에서 들린다는 생각을. 애초에 내 안에서 나는 소리니 귓가에서 맴돌다 사라지고,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찾을 수 없지. 그리고 내 안에서 이런 짓을 할만한 존재는 단 하나뿐이다.
"제4의 벽. 뱉어"
아주 작게 들리던 이명이 뚝, 멈췄다. 그럼 그렇지. 한동안 조용해서 뭐하나 싶었는데 이런 짓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김독자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뱉어. 내 기억들. 하지만 '제4의 벽'은 아무런 대답도, 미동도 없었다. 발뺌이라도 하려는 속셈일까. 김독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 녀석은 무슨 생각으로 내 생각을 먹으며 나를 곤란하게 한 걸까.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이번에는 특성창을 보여달라고도 안 했고…."
[이 건네 가 나 랑한 약 속을 잊은벌 이 야]
"약속?"
[김독 자 멍 청 이]
[결 국기 억 못 해]
'제4의 벽'은 김독자의 대답에 화가 난 듯 흔들렸다. 김독자는 시야가 흐려졌다 또렷해지길 반복하자 어지러워 짧은 탄성을 뱉고 휘청거렸다. 외부의 충격이 아닌 이 녀석의 기분에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이었다. 젠장 언제까지 마음대로 굴려는 걸까. 김독자는 상체를 굽혀 어정쩡하게 선체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제4의 벽'이 이때까지 자신을 지켜준 것은 인정했다. 그리고 대단한 스킬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그런데 몇 가지 문제가 있다면 정말 제멋대로 이빨을 드러내고 가끔은 시끄럽다고 느낄 정도로 떠들며, 다른 스킬과 다르게 토라진다는 것이다. 거기다 이제는 내 기억을 먹어치워 지장이 생기게 하다니. 언제는 친구들을 모아달라고 했으면서. 김독자는 울컥 올라오는 억울함에 입을 열었다.
"내 기억을 그렇게 먹더니, 이제 아주 사람이라도 된 줄 아나 봐?
자아를 가졌으니 그렇게 착각할 수 있지. 근데 어디까지 네 마음대로 굴 생각이야? 적당히 해."
이때까지 이 녀석 때문에 겪은 피로를 생각하며 말했더니 생각보다 심하게 나왔다. 그래도…. 김독자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때는 순간, 멈췄던 '제4의 벽'이 다시 부서질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헉하고 숨을 들이켜며 자세를 낮췄다. 이번에는 정말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들 정도로 흔들렸다.
무너질듯 흔들리는 도서관의 가장 안쪽에 김독자를 닮은 새하얀 머리칼의 소년이 주먹을 꽉 틀어쥔 채 서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소년의 눈가는 발갛게 물들어 있고, 안 울려는 듯 부릅뜬 두 눈의 흰자는 충혈되어 있었다. 소년은 꽉 쥔 힘을 못 이겨 떨리는 주먹을 들고, 자신 앞에 있는 벽을 힘껏 내려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제 화를 이기지 못해 수 번을 내려친 소년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조금 전 까지 내려치던 벽의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앉은 그는, 이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제4의 벽'은 김독자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울었다. 툭툭, 물기가 바닥에 추락하는 소리와 함께 쓰여지는 벽의 서술은 지독하게 자조적이었다. [내가 어쩌다 너를 아껴서.] [내가 너를 아끼듯, 나를 아껴주기를 바란 것 뿐이었는데.]
'제4의 벽'은 몸을 웅크렸다. 칼날 같은 말이 온몸을 찢고 싸늘한 생각이 제 몸을 때려오는 것이, 꼭 고립된 아귀 같은 꼴이라 생각하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닿고 싶은 것에 영원히 닿지 못하며 영원히 떠돌아다녀야 하는 존재. 내가 너에게 그렇게 나쁜 죄를 지었던가. '제4의 벽'은 뻗은 손끝에 닿는 서늘한 벽의 감각에 주먹을 쥐었다. '나는 아직도 부족해.' '제4의 벽'이 쥔 주먹 위에 문장이 삐뚤삐뚤한 글씨로 쓰였다. '제4의 벽'은 제 몸을 끌어안고 웅얼거렸다. '맞아. 난 아직, 부족해. 그러니까….' 마침내 벽은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고 미움받을 바에, 마지막으로 김독자가 싫어할 짓을 하기로 결심했다. 가라앉은 새하얀 눈동자가 벽 너머를 바라봤다.
김독자는 조용해진 '제4의 벽'에 초조했다. 시한폭탄을 끌어안은 기분이 이럴까.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는 천천히 숨을 뱉으며 진정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직도 쿵쾅거리는 심장은 쉽게 진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독자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깨끗한 공기가 폐의 안쪽에 들이차는 것을 느끼며 다시 '제4의 벽'과 대화를 시도했다.
-제4의 벽? 일단 진정하고,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김독자의 예상대로 대답을 돌아오지 않았다. 숨통을 죄어오는 듯한 침묵에 김독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이 심했어. 미안해. 듣고 있지?
이번에는 대답 대신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전과 다르게 콰득 콰득거리는, 명백하게 무언가를 씹어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소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괴로울 정도로 시끄럽고 머리가 울렸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 거야. 작게 욕을 중얼거렸으나 그 의문의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김독자는 비명과 함께 말했다.
"안 돼, 안 돼. 그만해, 제발 그만 해."
[멍 청 이]
'제4의 벽'의 조소가 들렸다. 마치 지난번에 기억을 먹었던 것은 장난이었다는 듯, 빠르게 흐려지는 기억들에 김독자는 공포감에 짓눌려 전신을 떨며 사정했다. 이대로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고 시나리오고 모든 것을 잊을 것이었다. 그럴 수 없었다. 김독자는 부서져 가는 기억을 보며 빌었다. '제4의 벽'은 책장의 모든 책을 찢고, 삼키며 그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평소의 그에겐 전혀 상상하지 못할 무너져내리는 모습과 자신에게 비는 모습인지. 곱게 휘어지던 하얀 눈동자가 광기에 가까운 탐욕을 드러냈다. 이윽고 만족한 듯 입가를 매만지던 '제4의 벽'의 하얀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러자 벽 너머로 보이던 김독자는 전신에 스파크를 달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제4의 벽'은, 쉽게 끝내줄 생각이 없었다.
[일 어나 김독 자]
김독자는 이질적인 목소리에 눈을 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이의 도서관. 그 가운데 자신은 새하얀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김독자는 낯익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상체를 일으켰다. 당황스러움과 호기심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깨끗한 이불과 그곳에서 삐져나온 양쪽 발목을 감싼 이상한 것이 보였다. 형체가 없는 검은색 덩어리. 그것은 생긴 것처럼 큰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차라리 그림자나 어둠이라고 부르는 게 어울릴 것 같은 녀석이었다. 김독자는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며 그것을 보았다. 족쇄..? 오랜시간 말을 하지 않은 것처럼 갈라지는 목소리가 도서관을 떠다녔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 청한 김독 자를위 한 거 야]
흠칫 놀란 김독자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곳을 보았다. 허나 어두운 도서관의 천장만 보였다.
[네 가늘 원 하던 곳 이니 걱 정마.]
'제4의 벽'은 키득키득 소리내 웃었다.
벽은 그날 분노하며 김독자의 기억의 대부분을 삼켰다. 그리고 그의 의식을 자신의 안에 가뒀다. 드디어 과거의 기억이 아닌 실제를 삼킨 것이었다. ‘제4의 벽’은 이제부터 실제를 통해 허기를 채울 생각에 잔뜩 들떴다.
[마음 놓 고 멸 살법 만 볼 수 있 는 곳.]
오로지 자신과 대화하고, 자신 만을 보는. '제4의 벽'이 여태껏 바라온 상황이었다.
[환 영 해 김독 자]
[여 기는 너 를 위 한 곳이 야]
*0487561, 08574, 53719, 1314
(너 진짜 바보 / 너 때문에 화나 죽겠어 / 내 마음은 여전하다 / 평생)

[성좌,
'마이너핥기'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無制
사벽독자 / 7대 죄악, 식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