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늘
제천독자 / 7대 죄악, 탐욕
[성좌,
'주접의 제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안개가 짙게 끼어 이슬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멀리 있는 건물들이 사라진 것처럼 흐리게 보이고 차갑지만 굵지 않은 빗방울들이 투둑투둑 떨어지는 날. 김독자는 온도가 가득 내려앉은 차 안, 운전석에 몸을 가득 기댄 채 하얀색 코트 깃을 단단히 여미고 창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노래 삼아 눈을 감고 있었다. 물방울이 가득 맺혀 흘러내리는 창밖으로는 컨테이너 박스들과 커다란 공장이 보였고, 그저 고요하디. 차가운 백색소음이 차내 가득할 뿐이었다.
긴 속눈썹이 예쁘게 닫힌 눈꺼풀이 파르르 흔들리고 앙 다물린 입술 사이로 작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독자는 떨어진 기온에 추운 듯 더욱 몸을 웅크렸다.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단지 눈을 뜨고 있자니 텅 빈 공간에 외롭게 떨어진 기분이 들어 눈을 감았을 뿐이다. 꼭 다물린 옷 사이로 스멀스멀 밀려드는 한기가 기분 나빠 독자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일정하지 못한 간격으로 귓가를 파고드는 빗소리가 참 거슬렸다. 일처리는 잘 했을까, 다치지는 않았겠지. 이번 건수도 이걸로 마무리인데 어디 좋은 곳이나 놀러갈까. 와 같은 생각들이 하나 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생각들의 끝은 결국 한 사람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손제천.'
독자는 제천의 생각만 하면 속이 울렁거리고 가슴이 답답해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끊어지듯 호흡을 뱉어내었다. 그 일 이후로 저를 까칠하다 못해 무시하고 있는 제천이 계속 신경 쓰여서 지금처럼 가만히 있다가도 쿡 자리 박힌 듯 떠오르고만 했다.
"하아……."
독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뻐근한 눈가를 죽 훑고 내려온 손이 시트로 툭 하고 힘없이 떨어졌다. 그렇게 한참 늘어지듯 꼼짝 않고 있다가 그것마저 지쳐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핸들에 두 팔꿈치를 얹고 그 위에 턱을 얹은 후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우중충하게 잿빛 구름으로 뒤덮였고 안개가 낀 세상은 연회색 빛이었다. 그 사이를 투명한 빗방울이 투둑투둑 채워 조금은 청록색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살짝 시선을 내리자 옆 좌석에 내려놓은 검은색 장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얌전히 놓여있는 장우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독자는 문득 오랜 옛 기억이 떠올랐다. 김독자의 인생에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꼽자면 빼놓을 수 없는 기억. 8년 전 그날은 독자의 기억 속에서 딱 지금과 같은 날씨였고 비슷한 배경을 하고 있었다. 이슬비가 내리고, 안개가 짙게 낀. 눈앞에는 검은색의 커다란 공장들이 늘어서 있고 지금보다는 덜 빛바랬을 콘테이너 박스들.
그날은, 김독자가 손제천을 처음 만나던 날이였다.
오랫동안 준비하던 일이 마무리 되고 가볍게 현장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이였다. 독자는 새하얀 코트 주머니 가득 손을 찔러 놓고 문 앞까지 길게 펼쳐진 피의 레드카펫을 유유히도 걸어서 공장을 빠져나왔다. 핏방울 하나 튈 법 한데 그의 코트 밑자락부터 뽀얀 얼굴, 검은 정장구두는 더할 나위 없이 말끔했다. 밖은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새벽에 내려앉은 뿌연 안개 사이로 작은 물방울들이 앞 다투어 낙하하고 있었다. 독자는 내리는 비 아래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물이 피부 위로 닿고 손바닥 안에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슬쩍 곁으로 다가온 부하 하나가 튼튼해 보이는 검은색 장우산을 건넸다. 스며드는 안개가 차가워서, 독자는 옷깃을 한번 가다듬은 후 우산을 펼쳐들었다.
안개 사이로 주차되어 있는 하얀색 세단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가면 따뜻한 물에 목욕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조금 옮겼을 때 즈음. 큰 보폭으로 달려오듯 걸어온 부하가 독자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저…….사장님, 꼬맹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녀석들 사이에서 잔심부름을 맡아 하던 아이인 것 같은데 작아서 미처 발견하지 못 한 모양입니다. 죽일까요?"
부하가 앞을 가로막고 선 이유를 빠르게 설명 하는 동안 어느 샌가 부하의 뒤에서 또 다른 부하 두 명이 잔뜩 굳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어린아이의 양 팔을 하나씩 잡은 채 끌고 나타났다.
아이는 얼마나 씻지 못 한 것인지 새하얀 금빛인 듯 한 머리칼이 떡지고 갈라져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여기저기 찢어진 옷 사이로는 상처가 벌어져 피가 맺히거나 멍이 든 것이 눈에 띄었다. 남루하다 못해 꾀죄죄하기 그지없는 행색 이였다. 독자는 고개 숙인 아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꾹 다물린 입술이 겁에 질려 잘게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독자는 새하얀 손을 뻗어 아이의 턱을 들어올렸다. 길게 뻗친 머리칼이 옆으로 젖혀지며 붉은색의, 두려움이 담긴. 어린아이라기에는 날카로운 눈이 독자의 검은 눈과 허공에서 마주쳤다. 두 사람은 한참 서로의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눈을 피하거나 울음을 터트릴 법도 한데 몸은 떨고 있으면서도 눈만은 피하지 않는 아이가 신기하고 이상해서 독자는 알 수 없는 충동에 휩싸였다. 아이의 눈은 계속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사람을 붙잡아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게 했다. 세상에 정제되지 않은 붉은색이 있다면 이런 색일까. 테는 금빛을 띄는 것이 참 묘한 눈이 이었다.
독자는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아이의 시선에 맞추어 무릎을 숙였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반 충동적인 말을 내뱉었다.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랑 같이 갈래?"
그 말에 부하들이 헛숨을 들이켰지만 독자는 느끼지 못했다. 아이의 붉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깜빡이고, 시선을 내리깐 채 작은 입술을 움찔대는 것에 홀린 탓이었다. 머뭇거리던 아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내밀어진 독자의 손 위로 조심스레 제 손을 겹쳤다. 독자는 아이를 제 우산 아래로 끌어당겼다. 고스란히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고 있던 아이는 검은색 우산 아래 서서 비를 피하며 독자를 올려다보았고, 독자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마주 잡은 아이의 작은 손은 찬 공기 속에도 따뜻했다.
이후 독자는 아이를 제 집에 들였다. 무슨 일인지 첫 만남에 겁을 먹던 아이는 금세 독자의 곁에 붙어 졸졸 따라다니며 떨어질 줄을 몰랐다. 독자는 아이의 이름을 손제천이라 지었다. 이름 짓기 능력이 꽝인 그가 며칠이고 고심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제 이름을 처음 들은 제천이 무척 해맑은 웃음을 지었던걸, 독자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에 독자를 제외하고는 조직원들 중 누구에게도 제 곁을 내어주지 않았던 제천은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조직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잘 웃지 않던 아이가 배가 아플 정도로 웃고, 장난을 치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사고를 치는 일이 조금씩 늘어났다. 제천은 점점 자라며 무겁던 조직의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단순하고, 잘 웃고, 재빠르고, 눈치도 좋은 제천은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었다. 비록 자라면서 크고 작은 사고를 친 것이 매우 많지만 작은 아이가 자라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함께 한다는 건 꽤 뿌듯한 일이였다. 그렇게 제천은 독자의 그늘 아래 조금씩 자라났고, 언제 태어난 것인지도 몰라 독자와 만난 날을 생일로 정한 것이 어언 8년. 제천은 최근, 스무 살 생일을 맞았다.
"제천아, 정말 갖고 싶은 거 없어?"
제천의 생일 하루 전날 밤, 독자는 이렇게 질문했었다. 18살생일 선물은 억소리나는 고급 스포츠카였고 작년 생일 선물은 스포츠카 다섯 대 가격의 빌딩 한 채 이었다. 매 해 생일마다 독자는 제천에게 이름 있는 것, 비싼 것들을 품에 안겨주었지만 제천은 단 한 번도 독자에게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 요구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어린아이일 때도 그랬다. 백화점에 대려가 가지고 싶은걸 마음껏 골라보라고 해도 제천은 별 흥미가 없어보였다. 그저 독자가 주는 것이라면 좋다고 웃으며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처음으로 제천이 가지고 싶은 게 있다고 대답했다. 걱정스런 얼굴이던 독자는 제천의 대답에 얼굴색이 피며 어서 얘기해보라 재촉했지만 제천은 내일 얘기하겠다 말하고는 빙그레 웃음을 지어보인 후 제 방으로 들어갔었다. 그리고 제천의 생일이 되던 12시, 독자는 제천이 바라는 생일선물을 들어줄 수 없었다.
"독자 형, 좋아해."
12시가 되자 제천의 방문을 열고 생일 축하한다며 들어온 독자에게 제 책상 앞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꺼낸 말이였다. 참 담담하고 당연스레 고백을 한 제천은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독자에게 날카로운 눈매를 부드러이 휘며 가득 웃어보였다. 처음 제천의 고백을 들은 순간 독자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어어, 나도 우리 제천이 좋아하지 라고 어물쩍 넘기려 들었다. 제발 그냥 넘어갔으면 좋으련만 제천은 그럴 성격이 되지 못했거니와 오래 기다렸기에 급히 몸을 돌리는 독자의 팔목을 붙잡았다.
"형,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
아프지 않게 붙잡아 누르는 힘에 독자는 어쩔 수 없이 제천을 마주보았다. 정말 진심이라는 듯 제천은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독자는 더욱 숨이 막혀오는 걸 느꼈다. 어느새 제 키보다 훌쩍 자라 저를 안아올 때면 제가 품 안에 쏙 들어가는 게 떠올랐다. 눈앞의 제천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소년도 아니었으며 한 사람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청년이었다. 독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 숙인 채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제천아, 나한테 너는 그냥…….어린 동생일 뿐이야."
"형."
"미안……. 생일 축하해, 잘자."
상처 받은 목소리의 제천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독자는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맞은편의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구자 마자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독자는 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떨리는 호흡을 진정시켰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콧잔등이 뻐근해지는 게 느껴졌다.
사실, 제천이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확신하고 있었기에 더욱 어린아이를 대하듯 했다. 제천은 그것마저 좋아했지만. 제천이 유독 저에게 달라붙는 것도, 가끔 가라앉아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도 전부 알고 있었다. 한번은 새벽에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제천의 방에서 신음소리와 제 이름을 낮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날 밤 독자는 잠을 자지 못했었다. 눈을 감으면 바로 귓가에 제천의 신음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오고 거기에 동하는 제 몸이 토할 것 같이 역겨워서 끓어오르는 배덕감에 밤을 새웠었다. 그랬기에 독자는 제천의 고백이 가장 마주하기 싫었던 진심이었다. 그날도 독자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밤을 보냈다. 제천의 고백을 듣는 순간, 아주 찰나였지만 두근거렸던 심장을 쥐어뜯으며 두 눈가가 부어오르도록 울었다.
아침, 독자는 제천의 고백을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독자에게 더욱 상처받은 듯 제천은 그 수다스러운 입을 꾹 다물고 모자를 눌러쓴 채 집을 나가 새벽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제천에게도 독자에게도 최악의 생일 이였다.
회상을 마친 독자는 땅이 꺼질 듯 깊게 한숨을 내쉬며 핸들에 이마를 박았다. 쿵 하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거센 클락션이 울렸다. 본인이 이마를 쳐 박았으면서 독자는 크게 울린 소리에 화들짝 놀라 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어쩐지 정신이 멍했다. 독자는 글러브박스를 뒤적여 깊숙이 숨겨둔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냈다. 떨어지는 비를 보며 잠깐 고민하다 옆자리의 우산을 집어 들고 차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에 비까지 내려서 그런가 담뱃불은 쉬이 붙지 않았다. 엄지 손끝이 새빨개지도록 몇 번을 당겨서야 불을 붙일 수 있었다. 깊게 빨아들인 첫 모금은 참 씁쓸했다. 숨을 깊게 들이 마시며 연기를 저 깊이 집어넣었다가 후 하고 내뱉자 차가운 공기 중에 매캐한 담배연기가 흩날렸다.
'아, 제천이가 싫어할 텐데.'
독자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목에 얼굴을 가득 파묻는 것을 좋아하는 제천은, 독자에게서 나는 냄새에 유독 민감했다. 흡연을 즐겨하는 독자가 아니었지만 어쩌다 한 개비라도 피고 들어오는 날이면 제천은 귀신같이 알아챘다. 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는 제천에 독자는 금연을 한지 오래였다.
독자는 머리가 얼얼하다 못해 휘청거릴 때까지 줄담배를 피웠다. 바닥에 떨어진 꽁초들은 이슬비를 맞아 금세 사그라들었다. 독자는 우산을 잡지 않은 한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독한 담배에 머리가 띵하고 울려왔지만 인기척이 없는 공장입구를 보다가 담배를 하나 더 입에 꼬나물었다. 어지러운 시야에 토기를 느끼기 시작 할 때 즈음 어렴풋이 작은 인영이 보였다. 독자는 반쯤 타다 만 담배를 발로 지져 끄고 제천에게로 걸어갔다.
거리가 좁아지자 제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천은 회색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고개 숙여 걸어오고 있었다. 제천의 후드 위로 빗방울이 점을 그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독자는 제천에게 다가가며 이름을 불렀다.
"제천아."
제천은 독자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 고개를 들지 않았다. 조금 초조하게 서 있던 독자는 조금 뛰듯이 걸어가 제천을 붙잡아 섰다.
"제천아."
단단한 어깨가 힘없이 붙잡혔다. 독자는 제 우산 아래로 제천을 들였다. 제천은 여전히 잔뜩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고 대답이 없었다. 독자는 가만 서있는 제천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이다 제천의 후드를 잡아 내렸다.
"나랑 얘기 좀……."
걱정스런 말을 꺼내려던 독자는 제천의 상태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세게 얻어맞은 듯 부어오른 뺨은 붉다 못해 시퍼런 멍이 들어가는 중이였고, 터진 입술은 피가 굳어 딱지가 앉았으며 코피도 흘린 듯 언저리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옷에 가려져서 그렇지 다리, 혹은 팔이 부러졌거나 멍이 들었을 수도 있고 몸 어딘가 칼에 찔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제천의 다친 모습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현장에 나갔다 하면 체술 위주의 싸움 방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딘가 다쳐오는 것이 비일비재 한 제천이었다. 하지만 몇 번을 보아도 제천이 다친 모습은, 독자를 아프게 했다. 제천이 최근 집에 들어오지 않아 며칠 만에 마주하는 모습 이였기에 이번은 더욱 그랬다.
제천은 독자가 잠시 말이 없자 고개 들어 시선을 마주쳤다. 진득한 시선이 멍한 눈동자를 잡아채고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얽힌 순간, 독자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제천이 아픈 눈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보았던, 상처받은 그 눈이었다. 독자는 또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옅게 미간을 찌푸린 제천의 표정에 참 죄스러워졌다. 독자는 손을 뻗어 제천의 입술을 매만졌다. 따가울 텐데……. 독자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제천은 독자의 손이 닫자 놀란 듯 흠칫, 몸을 떨고 시선을 피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와 꾹 다문 입술에 독자는 조심스레 제천의 뺨으로 손을 가져갔다. 제천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은 눈을 하고 잘게 떨고 있었다. 독자의 손이 제천의 멍든 뺨에 닿은 순간이었다. 화들짝 놀란 제천은 강하게 독자의 손을 쳐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허공에서 마주쳤다. 거부한 제천도, 거부당한 독자도 놀란 얼굴이었다. 제천의 표정이 죄책감으로 와락 일그러졌다. 그리고 독자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천은 휙 하니 몸을 돌려 독자의 우산 아래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행여나 독자가 저를 잡을까 다시 후드를 눌러쓰고 큰 보폭으로 멀어져갔다.
홀로 남겨진 독자는 꾹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제천을 잡으려면 잡을 수 있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상처받은 제천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우산을 말아 쥔 손이 하얗게 떨리고 있었다. 뇌리에 박힌 듯 그 짧은 시선이 잊혀 지지 않았다. 독자는 눈을 감고 고개를 털었다. 독자가 이상하게 답답한 호흡을 천천히 고르고 눈을 떴을 때, 제천은 사라지고 없었다.
제천은 습기가 차 뿌연 색의 거울너머로 제 몸을 훑었다. 선명한 근육과 떡 벌어진 어깨, 크고 작은 상처들. 제천의 크고 단단한 몸에는 이곳저곳 베이거나, 멍이 들거나 총에 맞은 상처들이 즐비했다. 크게는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흉터부터 오른쪽 옆구리의 총 맞은 자국, 자잘한 상처흔적들. 제천은 손을 뻗어 욕실 거울의 습기를 지워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선명히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보였다. 물에 젖어 축 늘어진 금발이나 날카롭게 뻗친 눈매, 딱지가 앉은 입술과 퍼렇게 멍이 든 뺨. 그리고 핏빛을 띄는 눈동자 까지. 거울 속의 지친 사내는 제가 아닌 것 같은 이질감에 제천은 세면대를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조용히 눈을 감자 속에서 핏덩어리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다. 제천은 와락 표정을 구겼다.
칼이나 총보다는 체술을 사용하는 싸움방식 때문에 제천은 현장을 뛰고 오면 어딘가 꼭 다쳐오기 마련이었다. 다만 독자가 걱정하기에 평소엔 몸을 사렸었다. 귀찮아도 물러날 때는 물러나고, 제 몸에는 피 한 방울 나지 않게 조심하며 싸웠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큰 싸움 이였고 상대 인원이 더 많은데다가 온갖 무기와 혈이 낭자할 것이기에 독자가 끼어들지 말라고 몇 주 전부터 당부했던 날이었다. 제천은 독자의 말이라면 꼬박꼬박 따르고는 했으나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분노를 표출할 곳이 필요했고, 울렁이는 감정을 잠시라도 잊어버릴 일이 필요했다. 제천은 아무 말도 없이 현장에 나타났다. 같은 조직의 사람들이 제천의 갑작스런 등장에 놀란 것도 잠시였다. 제천은 새빨간 눈동자를 흉흉히 빛내며 눈앞의 상대라면 기절, 아니 죽기 전까지 쓰러트려 넘겼다. 조직원들이 할일이 없어질 만큼 제천은 현장을 쓸어버리듯 날뛰었다. 제가 다치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움직임 이였고, 실제로 제천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얼굴로 주먹이 날아오고 칼에 베이고, 나뒹굴어도 제천은 상대가 일어날 수 없을 때까지 손을, 다리를 휘둘렀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쓰러진 수십의 적들 위에 지쳐 앉은 제천은 같은 조직원들도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었다. 누군가 말이라도 걸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조직원들은 그런 제천을 건들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제천이 없는 양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정리했다. 그리고 현장이 정리되는 것을 보며 거친 숨을 고르던 제천은 어느 정도 정신이 들자 입고 있던 면 티 위에 후드를 걸쳐 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독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주 어렸을 적, 기억이 나지 않을 때부터 아이는 줄곧 혼자였다. 5살에 다 쓰러져 가는 고아원을 나온 것이 첫 기억이었으며 이후 거리를 제 집 삼아 지냈다. 다행히도 어린아이를 불쌍히 여긴 행인들이 이것저것 던져주는 덕에 아이는 죽지 않았다. 저를 잘 돌보아 주던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아들 삼아준다고 해도 듣지 않았다. 주인의 남편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하게 끈덕졌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거리에 나와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눈치였다. 사람들의 눈치를 잘 보아야 제가 살 수 있다. 아이는 웃으라면 웃고 엎드려 빌라면 빌었다. 아이가 두 번째로 배운 것은 재빠름 이였다. 세상에는 무서운 사람들이 많다. 아직 어리지만 제 눈이, 장기가 좋은 갚어치에 팔린다는 걸 배웠고 어린아이에게 욕정 하는 더러운 인간들도 있다는 걸 배웠기에 아이는 도망치는 것을 배웠다. 아이가 세 번째로 배운 것은 사람은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저를 아들 대하듯 했던 술집주인이 조폭과 저를 두고 가격 저울질 하는 것을 듣고 난 이후로 아이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는 살아남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회색빛 뒷골목에서 버려진 옷으로 이불 덮고 먹다 남은 밥을 구걸하여 살았다. 아이는 정말 욕심이 없었다. 그냥 내일도 살아있으면 그만이었다. 거리에 나왔을 때부터 그게 다 인줄 알았다. 감히 욕심 낼 생각조차 못했다. 적어도 김독자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날은, 아이의 인생에 처음 그늘이 진 날이었다. 어둡고 차가운 그늘이 아니라 따스하고 안락한 그늘이.
심부름으로 담배를 사오라는 남자의 말에 아이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아니 열두 살짜리가 어떻게 담배를 사온단 말인가. 아이가 내민 돈을 받아들지도 않고 가만 서 있자 화가 난 남자는 두꺼운 손을 쳐들었다. 아이는 저 손을 피하면 더 맞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눈을 감고 둔탁한 고통이 가해지기를 가만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을 감고 있어도 예상했던 아픔은 내려앉지 않았다. 슬그머니 눈을 떴는데 남자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 예민한 아이의 귀에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직감적으로 눈치를 챘다. 아, 이 인간이 날 두고 튀었구나. 간간히 총성도 울리는 것을 봐서는 큰 싸움이 난 것 같았다. 아이는 재빨리 몸을 숙이고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았다. 아무리 제가 자주 심부름을 해준다 하여도 조폭은 위험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아이였기에 개구멍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아이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아주 작정하고 털러 온 것인지 새까만 정장을 입은 사람들은 출구란 출구를 다 막고 있었다. 제가 나가려던 길을 막고 선남자 때문에 곤란하게 된 아이는 공장 안 컨테이너 박스 뒤에 숨어 숨을 죽였다. 나가야 한다. 걸리면 백퍼 뒤진다. 아이는 이 길은 포기하고 제가 아는 다른 길을 찾으려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몸을 돌린 순간 마주한 검은 정장 때문에 놀라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른 아이는 잽싸게 컨테이너 사이로 몸을 날렸다. 그때부터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잡히기 싫어서 미친 듯이 도망치고 조직원들은 그런 아이를 잡으려 공장 내에서 진을 한참 뺐다. 결국 아이는 막다른 구석에서 양팔을 붙잡혔다. 아이는 잡힌 순간 제 운명을 직감했기에 잽싸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잔뜩 굳어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차가운 비가 조금씩 내리는 바깥으로 끌려 나가면서, 아이는 최대한 안 아프게 죽여 달라고 빌어야 하나 생각했다.
아이가 추운 안개 속에서 마주한 것은 선이 여린 사내였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보아 믿기 어렵지만 보스인 것 같았다. 아이는 사내에게로 끌려가는 동안 작은 머리를 굴렸다. 살 수 있을까. 무릎을 꿇어볼까.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은 눈앞에 검은색 구둣발이 보일 때 까지 이어졌다. 막상 그의 앞에 서자 입술이 달달 떨리는 게 느껴졌다. 머리위로 쏟아지는 차가운 시선이 서늘하다. 아이는 작은 손을 꼭 말아 쥐었다. 하얀 손이 제 턱 아래 닿았다. 아이의 턱은 사내의 손에 쥐어져 힘없이 하늘을 향했다. 길게 드리워져 있던 머리칼이 젖혀지고 아이와 사내의 시선이 맞물렸다. 사내의 눈은 밤하늘을 담은 듯 검은 색이였다. 불빛 가득한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안락한 어둠의 색. 무서웠지만 아이는 울지 않았다. 이상하게 사내의 눈을 마주한 순간 두려움이 사그라들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이상하게 따스했다. 사내가 저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도 그랬다. 이상하게 눈을 땔 수 없는 색체에 아이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며 옅은 숨을 내쉬었다. 한참의 정적을 먼저 깨트린 것은 사내였다. 하얀 손을 거두고 무릎을 숙인 후 저와 같은 높이에서 다시금 눈을 맞춘 사내는 아이에게 이상한 말을 꺼냈다.
"나랑 같이 갈래?"
제 앞으로 하얀 손이 내밀어졌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 은거지? 아이의 붉은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사람을 믿어도 될까.'
아이의 작은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아이는 다시금 고개를 숙인 채 고민에 빠졌다. 아무도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잠시 마주했던 검은 눈이 저를 끌어당겼다. 저 손을 잡으면 그 너머에는 제가 보지 못했던 다른 것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이렇게 공기가 시리고 추운데 이상하게 심장만은 따스히 두근거리는 게 이상했다. 오늘 처음 본 사내였고, 힘 있는 마피아 보스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분명 그런데. 아이는 홀린 듯 사내에게 끌리는 감정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는 살기 위해서가 아닌 제 마음이 이끄는 선택을 하기로 결정했다. 아마 수많은 피를 뭍였을 사내의 손이 너무나 깨끗하고 새하얘서 감히 제가 잡아 도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머뭇거리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사내의 손을 잡았다. 꾀죄죄한 제 손이 부끄러워서 손끝만을 걸치듯 쥔 것이 전부였다. 손을 마주잡자 사내는 아이를 제 우산 그늘 아래로 잡아당겼다. 검은 그늘이 머리 위로 지고, 더 이상 어깨에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마주잡은 손이 겪어보지 못한 따스함 이였다.
아이는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욕심이 생겼다.
제 이름이 제천이라 했다. 손제천. 아이는 처음 제 이름을 듣고 너무나 기뻐서 터져 나오려 하는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독자와 조직원들이 머리를 굴리고 굴려 어렵사리 지은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제천은 밝게 자랐다. 길거리에서 살아남느라 억눌려 있던 개구진 성격이 조금씩 드러났고 사고를 참 많이 치며 독자의 속을 썩였다. 그래도 제천은 독자가 하지 말라는 것은 다시는 하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 조직원 형들 말은 안 들어도 독자의 말만은 잘 들었다. 입을 삐죽 거리면서도 독자가 당부하는 것, 부탁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리고 독자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만큼은 털털한 성격은 어디 간 듯 예민하게 굴었다. 독자에게 미움 받기 싫어서 그랬다. 독자가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천은 줄곧 독자의 등만 보며 달려왔다. 독자의 옆에 서고 싶었다. 가져서는 안 될 욕심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동경과 애정을 넘어선 무언가 라는 걸 몰랐다. 처음 그 까만 눈을 마주한 순간부터 심장 깊은 곳에 박힌 씨앗은 자라고 자라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제천이 제 방에서 머리를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독자는 슬그머니 제 방에서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소파 앞 식탁에 들고 나온 구급상자를 내려놓았다. 씻고 나면 꼭 물 한잔을 마시는 제천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물기가 덜 마른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목에는 수건 하나를 걸친 채 제 방에서 걸어 나온 제천은 소파에 앉은 독자를 보고 멈칫, 걸음을 잠시 멈췄다가 못 본척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연 제천은 자연스레 캔 맥주 하나를 꺼내들었다. 보란 듯이 그 자리에서 캔을 따고 한 모금 들이킨 제천은 독자를 보지 못했다는 듯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천아 잠깐만."
제천은 독자를 언제까지고 못 본척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제천이 독자의 말을 무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독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제천은 독자의 부름에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다쳤잖아, 앉아봐."
제천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표정을 굳히며 독자의 옆으로 걸어왔다. 식탁에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내려놓고 수건은 소파 위에 걸쳐 놓은 제천은 독자와 조금 거리를 두고 소파에 앉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를 꼭 끌어안은 채 함께 영화를 보았던 제천이 제게 거리를 두자 독자는 조금 씁쓸해졌다. 꼭 두 사람 사이에 벽이 있는 것 같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사이에서 독자가 구급상자를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독자가 솜을 꺼내들자 제천은 가만히 입술을 내주었다. 소독약의 알코올 향이 훅 끼치고 제천은 따가움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독자는 그런 제천을 보며 가만히 웃었다. 연고를 바르고 작게 자른 밴드를 입가에 붙이자 꼭 어릴 적 다쳐오던 제천을 보는 것 같았다. 파랗게 멍이 든 뺨에 손을 가져다 대려던 독자는 아침의 일이 떠올라 허공에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제천은 여전히 독자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독자는 그런 제천에게 연고를 건넸다. 평소라면 목이나 허리에 난 상처에도 옷을 벗으라고 한 뒤 제가 직접 발라줬을 테지만……. 독자는 이제 와서야 위화감을 느꼈다. 제천의 큰 손이 독자의 하얀 손을 스치며 연고를 가져갔다. 묘한 분위기에 독자는 서둘러 구급상자를 정리했다.
"잘자."
"형, 잠깐만."
제천을 보지도 않으며 인사를 건넨 독자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이었다. 제천이 독자의 옷깃을 붙잡았다.
"우리, 할 얘기 있잖아."
독자에게는 정말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왔다. 독자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의 살 안쪽을 깨물었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해야만 했던 이야기를 제천이 먼저 꺼내왔다. 대화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독자는 호흡을 깊게 들이 마쉬었다가 내쉰 후 자리에 앉았다. 제천이 저를 빤히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독자가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좋아해, 형."
독자는 또다시 심장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 날 느꼈던 감정은 거짓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 받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천의 낮은 음성이 가까이서 들려오고 그렇게 저만을 보며 제 오랜 진심을 내뱉는다.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에 등골이 오싹해지는걸 느낀 독자는 눈앞이 어지러웠다. 차게 식어가는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선을 그어야 하는데. 저번처럼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형, 나 좀 봐."
제천은 잘게 떨리는 독자를 걱정스레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레 독자의 뺨을 잡아 저를 보게 만들었다. 제가 좋아하는 까만 눈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망울져 차오르고 있었다. 제천은 심장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눈이 저로 인해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형한테 뭐 해달라고 한적 있어?"
아니, 제천은 독자에게 그 무엇도 요구 한 적이 없었다. 그냥 독자가 좋으면 저도 좋고 싫으면 저도 싫다는 듯 가만 따랐을 뿐이었다. 독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제천의 붉은 눈이 무서웠다.
"형,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난 형 하나면 돼."
미세하게 일그러져 독자를 바라보는 제천의 표정이 간절했다. 독자는 숨이 막혀오는 걸 느꼈다. 제대로 마주한 제천의 감정이 생각보다 커서, 저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제천의 손이 독자의 뒷목을 타고 내려가 등허리에 닿았다. 손이 닿는 곳마다 스치는 옷자락이, 소리가 너무도 생생하게 들려와서 독자는 제가 꼭 제천의 먹잇감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제천은 잔뜩 굳은 독자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눈매를 곱게 휘며 웃었다. 그리고 체중을 조금 실어 독자를 제 아래에 눕혔다. 독자의 등이 푹신한 소파에 닿고 그 위를 제천이 지배하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독자의 위로 제천의 그늘이 졌다. 불이 꺼져 컴컴한 거실 안에서 달빛을 받은 제천의 눈만이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독자는 긴장했고, 제천은 여유로웠다.
미묘하게 위치한 제천의 다리가, 팔이 독자를 속박했다. 독자는 혼란스러웠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걸까 머리가 따라가기 어려웠다. 핑핑 도는 생각들을 깬 것은 제천의 작은 행동이었다. 따뜻한 제천의 손이 독자의 얼굴을 쓸어내리고, 가늘게 뻗은 목을 스쳐지나가서 옷자락에 부딪혀 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허리춤에 닿았다. 그리고 뱀이 기어가듯 슬그머니 옷 안으로 들어간 손은 독자의 맨 살을 어루어 만지고 훑고, 지분거렸다. 시선만은 저에게서 절대 거두지 않으며 손장난을 치는 제천의 행동에 독자는 아랫배가 울렁였다.
"형, 형은 내 구원이야."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천이 속삭였다. 독자는 또다시 제천에게 홀려 들어가는 걸 느꼈다. 붉은 눈동자가 검은색의 눈동자를 끌어 잡아 당겼다. 독자는 입을 벌리고 그저 제천을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는 지배감이 이상하게 좋았다.
제천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어느 순간 풀린 제천의 긴 금발머리가 독자의 하얀 얼굴 위로 긴 차양을 드리웠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것은 순식 간이였다. 두어 번 맞물리던 입술 사이를 가르고, 먼저 치열을 훑은 건 제천이었다. 작고 예쁜 독자의 입술을 깨물었다가 핥고 앞니를 쓸어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독자의 혀 위에 제 혀를 섞어냈다. 농밀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에 가득 감돌았다. 질척하게 혀가 얽히는 소리만이 거실에 울렸고 독자는 제천의 두툼한 혀를 받아내느라, 제천은 독자의 작은 입안을 헤집느라 바빴다. 제천의 키스는 탐욕스러웠다. 독자가 거친 호흡에 물러서려고 하면 끝까지 쫓아와 지치지도 않는지 호흡을 앗아갔다. 그리고 키스가 이어지는 순간에도 제천의 손은 가만있지 않았다. 독자의 허벅지를 쓸고 옷 안을 쓸어내리고 이마를 어루어 만지느라 바빴다. 독자는 배덕감을 느낄 새도 없이 제천에게 매달렸다. 조금의 틈이라도 허용치 않으려 몸을 맞댄 것은 독자였다. 키스는 길었다. 제천이 참아온 욕심만큼. 목 끝까지 차오르는 호흡에 독자가 발버둥 치자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제천이 입술을 때어냈다.
귀끝이 터질 듯 붉고, 입술은 타액으로 번들거리며 옷은 말려 올라간 채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려 헉헉 거리는 독자를, 제천은 눈에 꾹 박아 넣으려는 듯 샅샅이 훑었다. 제 그늘 아래 있는 독자는 참 예뻤다.
독자는 몰랐다. 그 날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던 이슬비 내리던 그날. 독자가 제 그늘 아래로 제천을 끌어당김으로써 시작된 제천의 한 가지 욕심을 몰랐다. 저가 지나가는 말로 건넸던 장발이 좋다는 말에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것도 몰랐으며, 어렷을적 형이랑 결혼할 것이라는 말에 독자가 스무 살이 되면 해주겠다고 해서 정말 스무 살까지 기다렸다는 것도 몰랐다. 독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제천의 욕심을 몰랐다. 붉은 눈이 욕심에 짙게 가라앉고 저를 끌어안아 왔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이제는 제천의 그늘이 제 그늘보다 훨씬 커져서, 제 그늘을 덮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았을 때 즈음, 독자는 이미 제천의 그늘 아래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