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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들의 사망, 자살 요소가 있습니다.

 

무() :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 상태

 

“행복한 생각 하면서 기다려.”

 

흐릿한 사내가 내게 말했다. 모든 사고회로가 멈춘 고장 난 머리로 기억을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그 ‘행복한 생각’을 찾아 수많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야만 했다. 자주 절망했고, 자주 포기했다. 그리고 그 기나긴 절망을, 셀 수도 없을 만큼 기나긴 세월을 거슬러서야 나름 행복했던 내가 흐릿하게나마 남아있었다. 그 언젠가에는 늘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손 놓고 꺼져. 빌어먹을 새끼야.’

 

상스러운 욕을 내뱉는 건방진 ‘너’를 떨어뜨리던 과거의 내 손이 부들거렸다. 옷깃 너머로 느껴지는 살결이 따뜻하여 나는 다리를 건널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다리와 함께 무너졌다. 어차피 이곳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고, 어차피 나는 다시 살아날 수 있기에 소란스러운 바깥 상황과 달리 나만은 고요했다. 눈을 길게 감았다가 뜨자, 뻔뻔하게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인사하는 너의 모습이 보였다.

 

‘중혁아, 우리는 세상을 구할 수 있다. 알지?’

‘중혁아, 괜찮아.’

‘내 이름은 김독자. 스물여덟…… 아니, 스물여덟 살이었고, …….’

 

그러한 순간들도 있었다. 네가 스타스트림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알림에 너를 영영 잃은 것이 될까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언제나처럼 내 이름을 사칭하며 네 존재감을 알림에, 도움을 요청하던 그 손길에 안심하던 그런 순간들도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다. 어느 순간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는 나와 조금은 다른 사랑을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사랑을 했다.

꽤 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가고 기억이 끊긴 듯, 수많은 김독자가 지나갔다. 언뜻 붉게 물든 것도 같았으나 그 모습은 누군가 일부러 가린 듯 흐릿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한참을 페이지 넘기듯 지나가고 멈춘 장면에서는 다시금 네가 보였다. 나는 네 쇄골깨에 얼굴을 박고 네 냄새를 맡기도 하고, 그러다 입술을 묻고 흔적을 남기면 너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종종 질척이며 달라붙는 진득한 움직임을, 그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내고, 인내한다. 가만히 달래주듯 받아내다가도 종종 신음을 내뱉는 네 반응이 기꺼워 한참을 그러다 보면 밤을 새우는 일도 잦았다. 그 회차에서의 끝은 어땠더라.

 

‘중혁아, 괜찮아. 알지?’

 

일순간 바뀐 장면에서 너는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 또한 너를 굳이 잡지 않았다. 네가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부, 사부는 괜찮아? 저 아저씨 또 사라졌잖아!’

 

누군가는 그것을 무신경하다고 표현하기도 했고,

 

‘중혁 씨랑 독자 씨는 가끔 신기해요. 어떻게 그렇게 서로를 온전히 믿을 수 있죠?’

 

누군가는 그것을 ‘신뢰’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신뢰라고 포장하기엔 너무나 거창했으며, 무신경하다고 표현하기에는 그 빈자리를 꿰찬 상실감을 표현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대신 유중혁은 그것을 ‘나태’라 칭했다.

그것은 학습된 부재였고, 학습된 귀환이었다. 네가 떠나던 모든 순간은 내게 괴로움이었으나 그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모든 기쁨과 환희와 절망과 괴로움을 포기했다. 김독자도 마찬가지였을지, 아니면 그 조그만 머리로 또 어떤 끔찍한 생각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김독자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보다 더 빠르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중혁아, 뭔가 잘못된 것 같아.’

‘…….’

‘우리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내 아래에 깔린 채 잔뜩 흔들리던 몸으로, 내 목에 매달린 채 그렇게 말하던 네게 나는 뭐라고 말했던가. 그의 말은 이렇게 생생한데 내 목소리는 흐릿하기만 했다. 그 처음과 달리 물기마저 품은 그 축축한 소리가 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펑펑 울던 너는, 다음날, 내 곁을 떠났다. 그 회차는 네가 처음으로, 죽음이 아닌 방식으로 나를 온전히 떠난 날이었다. 그것이 1862회차의 일이었다.

 

몇 년이고 찾아 헤매다 완전히 떠나버린 것을 깨달은 나는 망설임 없이 칼을 빼 들었다. 다시 너를 볼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은 나를 기쁘게 만들기까지 했다.

 

“…중혁, 깼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모든 순간의 김독자를 사랑했다. 그 긴 세월을 버틸 수 있던 까닭도 ‘김독자’의 존재였으므로, 회귀의 끝에 더 이상 네가 없음을 깨닫자 포기했던 감정들이 수마와 같이 몰려들었다. 그가 없는 세계는 무()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아주 오래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에, 흙이 묻은 거친 손으로 네 볼을 매만졌다. 손바닥으로 펴지는 온기에, 어색해하는 네 목소리에, 이끌리듯 심장이 뛰었다.

 

나를 죽이고자 하는 한수영과 절박하게 싸우는 김독자의 목소리에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 모든 회차의 나를 놓지 않으려는 너는 여전히 독자였다. 내가 사랑했던, 사랑하는 김독자였기에, 칼을 들었다. 내게 죽지 말라며 애원하는 그 긴박한 목소리가 늘 최선을 다해 서로에게 달리던 그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가 서로의 안락함에, 나태에 빠져 망가지던 지난 회차처럼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나를 죽여 ‘김독자’는 알지 못하는 회차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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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

'매혹 닭갈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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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독자 / 7대 죄악, 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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