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간혹 생각해본 적이 있었으나 김독자는 그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릴 수가 없었으므로 한숨을 내쉬고 그저 마음 한 켠으로 치워두기 바빴다. 어떻게보면 멸살법, 정확히는 유중혁이 저 해답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결국 논외의 영역에 있었다. 아주 논외도 아니겠지만.
살아있음에 감사하라. 그런 말을 언젠가 들어본 것도 같은 기억이 났다. 김독자는 입 안쪽의 살을 짓씹으며 그 말이 얼마나 참담한 것인지 느끼고 말았다. 멀쩡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저런 말을 생각할 겨를도 없으리라. 분명 저것은 꺼져가는 생명에게나 의미가 새겨지는 말이리라.
분에 못 이겨 몰아치는 간헐적으로 멈춰버리는 숨에 머리에 뿌옇게 서리가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지만 그것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식히지는 못했다.
김독자는 사라지지 않는 화를 짓씹으며 물 먹은 솜처럼 늘어진 몸을 이끌고 벼랑 끝에 섰다. 이것이 정말로 벼랑 끝인지 어떠한 것의 끝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 당장의 수단은 이것 하나 뿐이었다.
"김독자!"
뒤에서 유중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김독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돌아보게 되면 후회할 것이 뻔했기에 그는 유중혁이 달려오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더 이상은 놔두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벼랑 끝으로 발을 딛었다. 그제야 돌아간 시야로 천천히 유중혁이 들어왔다. 화가 난 건지 슬퍼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손을 뻗은 채 그를 바라보며 무어라 이야기를 했지만 닿기도 전에 허공으로 흩어져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았다.
아.
김독자는 그제야 짧은 신음성과 같은 후회를 짤막하게 내지르며 유중혁이 내뻗은 손을 잡으려 몸을 틀었다.
그러나 손을 뻗은 것이 무색하게 그의 손 끝에는 고작 스산한 바람결만이 스쳐지나갔다. 중혁아.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내서 겨우내 부르고 싶었던 이름을 불렀을 때, 유중혁의 얼굴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그를 바라보았다.
"……자!"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으나 동시에 천천히 진행되었다. 말도 안되는 모순이었지만 정말로 그러했기에 그는 다른 표현을 할 수 없었다. 유중혁에게도, 자신에게도.
괜찮아. 잘 될 거야.
나를 믿어, 중혁아.
닿았을지 닿지 못했을지 알 수 없는 말을 겨우 잇새로 내뱉고 그대로, 암전이었다.
1
파멸에 앞서 교만이 있고 멸망에 앞서 오만한 정신이 있다.
- 잠언, 16장 18절
2
지겹게도 울리던 알람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난 김독자는 대충 침대를 정리하고서 물 한 컵을 마셨다. 미적지근한 온도의 정수는 잠을 깨우기엔 부족했으므로 찬 물을 반 컵 정도 더 마시고 나서야 화장실로 들어가 씻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챙겨입고 충전 중인 스마트폰의 화면을 흘깃 바라보며 시간을 체크했다. 거기까지 끝냈으면 고리타분한 디자인의 가방을 챙겼다. 지루한 이 모든 것들을 다 끝냈다면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찰칵. 김독자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걸으며 늘 읽던 소설을 읽어내려갔다. 무감각해보이는 하얀 얼굴이 유일하게 생기가 도는 시간이었다. 그는 소설 속의 주인공을 읽어내리며 아무도 모르게 슬쩍 웃곤 잘 읽었다며 감상을 댓글로 남겼다.
그 즈음이 되면 그에게 있어서 별 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자신을 계약직으로 고용했을 뿐인 회사에 도착하게 되는데, 김독자는 항상 회사 건물을 눈으로 한 번 훑고는 들어가곤 했다. 별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냥, 바라 볼 뿐이었다.
'■■■, 다음 전개 때는 어떻게 행동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3
헉. 갑작스럽게 숨을 들이키며 자리에서 일어난 김독자는 어둑한 방 안에서 싸늘함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별 다를 것 없는 심심한 자신의 방이었다. 늘 그렇듯 아무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제 방이었다. 찬찬히 돌아오는 숨을 느끼며 김독자는 다시금 베개에 머리를 뉘였다. 출근을 하려면 잠을 자야하는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곤란했다.
역시 꿈이 문제인가? 김독자는 중얼거리며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흐릿해진 꿈 속의 인영을 덧그렸다. 키는 컸고, 뭔가 어둑한 빛깔이었던 것도 같고 잘 생겼었지. 유중혁을 실제로 만난다면 그런 느낌일 거야. 김독자는 유중혁처럼 생겼었던 꿈속의 남자를 생각하다가 창 밖으로 언뜻 보이는 무언가에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톡, 톡.
얄팍한 유리를 두드리는 것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이고. 분명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는 뭔가 좋지만은 않은 느낌이 들어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치고 등을 돌려 누웠다.
톡, 톡, 톡.
톡.
톡톡.
"……."
시끄러워. 그렇게 중얼거린 김독자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려 스스로를 파묻고 귀를 틀어막았다. 평소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유난히도 거슬렸다.
"시끄럽다고…."
4
어제와 마찬가지로 지겹게도 울리던 알람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난 김독자는 대충 침대를 정리하고 물 컵을 들어올렸…… 「■ 독자 ■ 청■■.」 무언가 들린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김독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손에 들린 빈 잔을 식탁 위에 두고 느릿하게 화장실로 향했다. 중간에 한 번 깨서인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몸에 한숨을 쉬곤 거울을 바라보는데 문득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여겨져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에 문제라도 생긴게 아닐까? 김독자는 스스로의 얼굴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에 조금은 심각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어디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그는 그저 갑갑한 기분만을 떠안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얇은 머리칼을 손으로 헤집으며 뭔가 이쯤에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하고 중얼거렸으나 사람의 머리에 머리카락 말고 다른 것이 있을리가 없었으므로 김독자는 내일 꼭 시간을 내어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안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는 도중 문득 김독자는 생각했다.
나 흰 코트가 있지 않았었나? 뭔가, 누군가랑 색만 다르고 비슷한 느낌의….
……아, 정말로 내가 미쳐버린 건 아닐까?
김독자는 등줄기로 오싹하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괜히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흰 벽지, 대충 정돈 된 침대, 버석하게 마른 방바닥, 충전기가 꼽혀있는 콘센트, 쓸데없이 커다랗고 하얀 옷장. 더 이상은 없었다. 김독자는 심하게 허전한 자신의 방을 이제서야 이상하다 느끼게 된 것에 혼란스러워하며 입던 옷을 내던지고 대뜸 옷장을 열었다.
하얀 코트.
하얀 코트.
하얀 코트, 그리고 또 하얀 코트.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에 김독자는 하얀 코트만이 무성하게 들어차있는 옷장을 손으로 헤집으며 필사적으로 굴었다. 대체 무엇을 향해 그렇게 필사적인지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쉼없이 손을 움직였다. 뒤엉킨 머릿속을 애써 무시하고 간헐적으로 밭은 숨을 내쉬며 김독자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미칠 것 같을 때마다 의지했던 것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뭐였더라? 누구였더라?
째깍, 째깍.
이가 기괴하리만치 딱딱 부딛히며 방 안에 존재하지도 않아 들릴리 없는 시계 초침 소리에 맞춰 불안감을 표출했다. 홀로 이런 기묘한 상황에 던져진 것에 아무리 그라고 해도 소름돋을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의 상식의 범주에서 벗어난 그림 속에 자신이 끼어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두려워할 것이었다.
가령 ■■■이라도.
■■■? 순식간에 머릿속에 스쳤다가 사라진 것 같은 이름에 김독자는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누구의 이름인지 떠올려보려고 해도 거짓말처럼 자음 한 글자조차 생각이 나지 않아 답답할 지경이었다. 무언가가 머리를 좀 먹고 있는 것처럼 야금야금,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확실했다. 좀 먹히고 있는 것을 한 번 의식하니 기억나지도 않은 모든 것들을 자신으로부터 멀리 떠나보내는 기분이 들어 김독자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하얗게 질린 방을 바라보았다. 숨이 턱 막히는 공간. 아, 여기가 원래 이런 기분이 드는 공간이었던가? 구역질마저 밀려올라오는 감각에 그는 게워낼 것도 없으면서 방 밖으로 달려나갔으나,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져 고개를 푹 숙이곤 '이건 꿈이야.' 라고 되뇌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다시금 들어올렸다. 눈 앞의 광경은 변한 것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발을 딛고 서있을 바닥도 없었으며 멍하니 바라 볼 천장도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그럼에도 김독자는 자신이 아직 미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눈 앞에 벌어진 것을 현실이라 받아들이기에 버겁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건….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미친 것 같기는 하지만 현실은 뭔가 더 거대하고 믿을 수 없는 것들이 가득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고작 이런 걸로 이렇게 혼란스러워 할 일이던가?
그것도 잠시,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아직은 미치지 않았다는 생각에 대한 반증 아닐까 하는 생각에 눈을 깜빡였다.
어쩌면 자신은 이미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5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을 보았느냐?
그보다는 우둔한 자가 더 희망이 있다.
- 잠언, 26장 12절
6
쿵.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둥둥둥, 북소리 처럼 장대하게 울리는 소리가 끝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들려와 김독자는 문턱에 쪼그리고 앉아 며칠 째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자리했다. 오롯하게 있는 것이라곤 자신 하나인 곳에서 무엇을 해야할지도 모른 채 멀거니 까만 공간을 훑을 뿐이었다.
가진 것이라곤 빈 화면만 내보이는 스마트 폰과 옷장 안에 들어찬 흰 코트, 희게 질리다 못해 비어버린 느낌마저 드는 자신의 방 뿐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다리사이에 고개를 묻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김독자는 참담한 기분마저 맛 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내가 뭘 했다고 이런 일을 겪어야 할까…. ■■아."
한탄하듯이 내뱉은 말이 공허하게 흩어졌다.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질 지경에 약간은 무서운 기분이 들었으나 개의치 않으려 노력했다. 물론 모든 것이 마음 먹은대로 되진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서.
7
며칠이 지났을까? 아니, 어쩌면 몇 주일지도 혹은 몇 달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독자는 사물처럼 건조한 빛을 띄고서 미동없이 문턱에 쪼그리고 앉아 아무것도 없는 너머를 계속 바라보았다. 누구라도 있었으면. 혹은 무엇이라도 곁에 두었으면 이렇게까지 견디는 것에 벅차진 않았을 텐데. 김독자는 그런 후회를 하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숨 소리마저 거슬릴 정도로 크게 들리는 상황에 다시금 암담함이 느껴져 고개를 푹 숙였다.
분명이 이 방법이 가장 낫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생각한 것에 김독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릿속에 온전하게 존재하던 것들이 야금야금 먹힐 땐 언제고 이번엔 기억도 나지 않는 것을 기억해내서 괜찮았었을 것이라는 평가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김독자는 눈을 질끈 감고서 자기 머리를 손으로 내려쳤다. 이런 미친 상황에서 도망칠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텐데, 이게 가장 낫다고 생각했었다니. 만에 하나라도 정말 이 상황이 자신이 받아들여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김독자는 스스로를 미친놈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였다. 중혁이도 없는데 어떻게 혼자서 버틸 생각을….
아, 중혁이.
유중혁.
숨을 헙, 들이 마신 김독자는 갑작스레 생각 난 이름에, 떠오르는 몇 가지 기억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지옥으로 자신을 밀어넣는 행렬의 끄트머리에서 울리는 북소리처럼 심장이 울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장에 가득 들어차 있을 흰 코트를 찾으러 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기억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가득히 옷걸이에 걸려있던 흰 코트는 온데간데 없고 잘 개어진 하나만이 옷장 밑바닥에 자리할 뿐이었다. 자신 외에는 존재하는 것이 없는 곳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김독자는 등줄기 사이로 서늘함마저 느꼈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었다. 김독자는 흰 코트를 꾸역꾸역 몸에 걸치고 섰다.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에 약간은 실망했으나 괜찮았다. 아주 잃은 줄로만 알았던 것이 다시 돌아온 것은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으니.
김독자는 괜히 손을 말아 쥐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검고 드넓은 공허를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없지만 아주 없지만은 않았다. 분명 그러할 것이었다. 그 때, 자신의 생각은 틀린 적이 없었으므로. 김독자는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았다. 정말로.
행복한 기억을 하자. 김독자는 언젠가의 유중혁에게 했던 것만 같은 말을 기억해내곤 스스로를 위로하며 아직은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는 유중혁에 대한 것들을 머릿속에서 덧그리기 시작했다. 흐릿하게 물에 젖은 것처럼 번진 기억들은 고작 유중혁이라는 이름 세 글자 아래에서 천천히 모양새를 찾아갔다. 어떻게 잊고 있을 수 있었을까? 김독자는 자신이 고작 차선책 하나로 인해서 유중혁의 이름 세 글자조차 기억하지 못 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해하기도 했다. 어쨌든 유중혁은 자신에게 있어서 논외의 영역에 있는 존재였으니까.
논외의 영역이라, 사실 말만 번지르르 하지 김독자와 유중혁을 살아가는 세계가 다른 각자의 개체로 인정할 수 없는 스스로의 아집이었다.
그러나 김독자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구태여 저런 말 따위를 하며 자신과 유중혁은 서로 다르며 결코 같은 곳에 있을 수 없다고 정의했다. 마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8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김독자는 이제는 얼마나 지났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 시간에 속이 메슥거릴 지경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괜찮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에는. 왜냐면 어떤 믿음이 있었으니까. 자신이 한 선택이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으며 누구도 혼란스럽지 않고 마무리 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손을 뻗으면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방도가 있었고 머리를 굴리면 타파할 수단이 생겨났으며 오롯하게 홀로 있지도 않았으므로 가능했었다는 것을 김독자는 이제와서 다시금 깨닫고 말았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그저그런 평범한 인간임을 시나리오에 묶인 존재로서 살게 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 잊었던 것이었다.
오만했다.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었다.
희고 푸르게 질린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김독자는 망연히 짙은 허공을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젓고선 눈을 감았다 뜨기만을 반복했다. 마치, 방 안에 건조하게 배치된 사물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맥동하는 법을 잊은 것만 같았다.
무언가 바뀌리라 생각하고 벌인 일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곳으로 자신을 뿌리 내리게 했다. 김독자는 자신이 한 일에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아마 지금은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확실히.
김독자의 시선은 우두커니 공허를 쫓았으나 차차 무언가 달라졌다.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체념을 불러일으켰다. 부정적인 것들은 인간을 빠르게 좀먹는다고 했던가? 그는 그게 맞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발목을 타고 기어오르는 부정들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가진게 오로지 부정밖에 없었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문득, 시선 끝에 닿는 짙은 공허가 너무 괴로웠다. 김독자는 힘 없이 내려앉은 몸을 일으켜 백짓장이나 다름 없는 코트자락을 휘날렸다. 낮은 곡선을 그리던 것은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다리 위로 내려 앉았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에 잘게 떨린 코트 자락이 다시금 결을 따라 곡선을 그렸고 금세 보드라운 이불 위로 펼쳐졌다. 코트 자락이 그가 침대 위에서 움직임에 따라서 조금은 구겨진 것도 같았지만 김독자는 개의치 않고 몸을 말아 웅크렸다. 고요했다. 귓가에 선연하게 울리는 자신의 고동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며 천천히 숨을 들이키고 내쉬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숨 소리와 맥동만을 쫓으며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
9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만 품지 마십시오. 아버지 말씀만 옳고 다른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누가 자기만이 현명하고, 말과 정신에 있어 자기만 한 사람이 없다고 여긴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막상 알고 보면 공허하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中
10
무수히 많은 별들의 수만큼 김독자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생각을 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끊임없이 생각을 이어나갔다고는 하지만 그 시간들이 결코 생산적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저 한밤중에 스쳐가듯이 보았던 별들의 수만큼이나 사소하고 보잘 것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러한 생각마저도 자신의 머리를 아프게 하기에 충분했으므로 김독자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눈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서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까 김독자는 이를테면, 그저 이 방 안에 존재하는 어떤 ‘물건’ 이 되기로 결심한 것처럼 굴었다. 무기질적인 어떠한 것이 되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 하에 내려진 행동이었다. 이마저도 스스로가 내린 생각이었으나 그것까지 의미를 둘 여력이 없었던 김독자에겐 이것이 최선의 선택 안에서 행한 최악이 아닌 선택이었다.
김독자는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깜빡였다. 깜빡, 깜빡. 힘을 다해 점멸하는 전구처럼 움직이던 눈꺼풀이 결국엔 내려 앉았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희끗한 방에 서늘함만이 감돌았다. 공허했다.
결국 방 밖과 방 안이 다를 것이 없었다.
11
둥둥둥.
똑똑똑.
12
김독자는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를 들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래 전 멎은 줄 알았던 자신의 맥동이 내는 소리였다. 파리한 낯빛이 아무런 감흥 없이 소리를 듣고서 흘려보냈지만 이상하게도 끊이지 않았다. 보통 이쯤하면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던데. 김독자는 의아하게 여기긴 했지만 아직도 완전히 체념하진 못했구나, 하며 눈을 감을 뿐이었다.
쿵쿵쿵.
시끄럽게 울리는 박동에 김독자는 다시금 눈을 떴다. 속이 메슥거리는 기분마저 들어 가슴께를 쥐어뜯다시피 내리쳤다. 그만, 그만. 소음에 가까운 소리에 김독자는 두 귀를 막고 이를 꾹 깨물었다. 안정이 필요했다. 조용한 것이 좋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편이 좋았다. 잇새로 자신의 신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알았지만 온 몸으로 안정을 꾀하고 싶음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하며 버둥거렸다.
쿵.
그 소리를 끝으로 모든 소음이 멎은 듯 조용해졌다. 김독자는 그 상태로 멈춰서 숨을 고르며 서늘해진 등골에 닿는 이질적인 온기에 몸을 둥글게 말았다. 얄팍한 옷감 너머로 간질한 촉감이 닿더니 천천히 닿았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는 것에 어쩐지 눈가에 열이 오르는 기분마저 들었다.
“김독자.”
김독자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몸을 둥글게 말고는 무기질적이려 했던 지난 시간들과 같이 행동할 뿐이었다. 정말 미쳐버려서 이 모든 걸 환청으로 환각으로 느끼고 있는 거라면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애써 모르는 척 하곤 꿋꿋하게 하얀 바닥만을 바라보았다.
“늦어서 미안하다.”
유중혁은 미안하다고 할 녀석이 아니었다. 김독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잘게 떨었다. 진짜냐, 진짜가 아니냐의 기로 사이에서 급하게 고민하던 그는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유중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서늘하게 홀로 떨고 있는 김독자를 천천히 일으켜 안을 뿐이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었다. 김독자라면, 자신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을지도 몰랐다. 유중혁은 짧은 후회를 일갈하고 눈을 감고 있는 김독자의 찡그린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랐다는 것을 직감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만 커졌었다. 애초에 찾았어야 했었는데. 너무 늦게 와버렸다.
눈을 뜨라고 몇 번이나 유중혁이 말 한 끝에야 김독자는 슬며시 눈을 떴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는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 제대로 된 것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던, 기억 속의 그 얼굴이 자신의 눈 앞에 있었다.
안도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이 쏟아져내리는 감각에 김독자는 유중혁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짧게 고개를 저었다. 늦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부정의 의사인지 거짓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표시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이 미쳐서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는 것에 다행이라고 여겼다. 유중혁은 그저 그런 김독자를 어설프게 품에 안아 다독이며 소름끼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방 안을 훑어내릴 뿐이었다. 용케 미치지 않고 있던 김독자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중혁아.”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갈라지는 목소리에도 유중혁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반문하며 김독자의 등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돌아가자.”
13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간혹 생각해본 적이 있었으나 김독자는 그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릴 수가 없었으므로 그저 눈 앞의 것들에 충실하기로 했다.
제 앞을 걸어가는 유중혁을 멀거니 바라보다 보폭을 같이 해 걸으며 김독자는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유중혁이었으므로 해답이라면 해답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성좌,
'모나'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논외의 영역
중혁독자 / 7대 죄악, 교만